어느 날, 거미 아난시는 정성껏 가꾼 밭에서 탐스러운 얌 몇 개를 수확했다. 유난히 빛깔 좋고 향긋한 얌을 손에 넣은 아난시는, 노릇하게 구워 혼자만의 만찬을 즐길 생각에 들떠 있었다. 화롯가에 앉아 막 얌을 맛보려는 찰나,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
"이런, 누구지?"
아난시는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거북이가 서 있었다.
"아난시, 부디 나를 들여주게. 먼 길을 걸어왔더니, 온몸이 녹초가 되고 배도 몹시 고프네."
딱한 거북이의 모습에, 아난시는 냉정하게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난시는 지독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귀하게 얻은 얌을 타인과 나눌 마음이 전혀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교활한 계략을 떠올렸다. 거북이가 식탁에 앉아 얌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아난시는 험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거북이, 웬 더러운 손! 그 꼴로 얌을 먹겠다는 건가? 당장 가서 손을 씻고 오게!"
사실 거북이의 손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거북이는 군말 없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강가로 향했고, 정성껏 손을 씻은 후 다시 아난시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아난시는 혼자 얌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거북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거북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아난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제 집 근처에 오시게 되면,
꼭 들러주시어 제가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거북이는 천천히, 그러나 굳은 심지로 자신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흐르자, 아난시는 거북이의 '만찬 초대' 약속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짜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부풀어 올랐고, 마침내 아난시는 거북이의 집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해 질 녘, 노을이 강물에 붉게 번지기 시작할 무렵, 아난시는 거북이의 집에 도착했다. 거북이는 여느 때처럼 따뜻한 햇살 아래 바위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난시를 발견한 거북이는 반갑게 맞이했다.
"아, 아난시, 어서 오십시오. 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까?"
아난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자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배고픔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거북이는 잠시 후 식사 준비를 위해 강물 속으로 잠수했다. 아난시는 강둑 바위 위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얼마 후, 거북이가 다시 물 위로 떠올라 말했다.
"아난시,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강물 속으로 함께 가시죠."
거북이는 다시 물속으로 잠수하여, 저녁 식사로 준비한 푸른 해초를 먹기 시작했다. 아난시도 거북이를 따라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거미인 그는 거북이처럼 깊이 잠수할 수 없었다.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기만 할 뿐이었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저녁 식탁은 그림의 떡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절망적인 순간, 아난시에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외투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채워 넣자, 마침내 몸이 무거워져 강바닥으로 가라앉을 수 있었다.
"역시, 이 아난시님의 지혜란!"
스스로 감탄하며 강바닥에 도착한 아난시는, 눈앞에 펼쳐진 풍성한 만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싱싱한 해초와 다채로운 해산물이 식탁 가득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난시가 탐스러운 음식을 집으려는 찰나, 거북이가 정색하며 그를 제지했다.
"아난시, 설마 외투를 입은 채 식사를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 집에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아난시는 생각지도 못한 거북이의 지적에 당황하며,
"아, 물론이지, 거북아. 내가 잠시 잊었군."
하며 어리석게도 외투를 벗어버렸다.
외투 속 돌멩이의 무게가 사라지자, 아난시는 다시 깃털처럼 가벼워져 순식간에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허망하게 물 위에 뜬 아난시는, 고개를 떨군 채 거북이가 만찬을 즐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기심으로 꾀를 부렸지만, 결국 어리석음만 드러낸 아난시의 씁쓸한 최후였다.
아난시는 비로소 그 순간, 자신의 그릇된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리고 타인을 기만하는 술책은 결국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자각했습니다. 이에 아난시는 거북이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전했고, 이후로는 타인을 기망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는 간교한 술책을 더 이상 자행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라는 황금률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아난시 (Anansi) 이야기: 꾀로 이야기를 얻은 거미 신
아주 먼 옛날, 세상은 아직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 감정들을 풀어낼 이야기가 없었기에 마음은 늘 어딘가 텅 빈 듯했습니다.
allmonsters.tistory.com
'민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메르 신화: 영웅왕 길가메쉬와 하늘 황소 (28) | 2025.03.03 |
---|---|
노아의 방주의 원조? 수메르 신화 속 대홍수 이야기 (24) | 2025.03.02 |
수메르 신화: 이난나 여신의 지하 세계 여행 (32) | 2025.03.01 |
고획조 설화: 밤의 그림자, 아이를 훔치는 요괴 (36) | 2025.02.28 |
아스왕 설화: 분리되는 아내 (The Aswang Bride) (32) | 2025.02.26 |
아난시 (Anansi) 이야기: 여섯 아들과 함께한 위대한 귀환 (51) | 2025.02.25 |
아난시 (Anansi) 이야기: 꾀로 이야기를 얻은 거미 신 (50) | 2025.02.24 |
캇파 설화: 오이 향에 숨겨진 인간과 요괴의 공존 (29) | 2025.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