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차가운 물결이 비늘 덮인 나의 긴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인간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영원의 평화, 그 심연의 고요함. 하지만 때때로, 그들의 얕은 어리석음은 달콤한 독처럼 나를 유혹한다. 오늘 밤, 은빛 달빛이 수면에 흩어져 반짝이는 모습이… 나쁘지 않아. 오랜만에 인간 세상 구경이라도 나서볼까.
수면 위로 천천히 머리를 내민다. 뭍 가까운 곳, 어김없이 어리석은 발걸음들이 어슬렁거린다. 녀석들의 눈은 늘 똑같지. 호기심과 희미한 경계심이 뒤섞인 불안한 시선. 마치 위험을 감지한 듯 조심스러운 척하지만, 결국에는 그 하찮은 동정심이라는 감정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지. 어리석은 존재들.
나는 품 안의 작은 짐을 더욱 애처롭게 끌어안는다. 낡은 천 조각 몇 겹에 불과하지만, 어둠 속에서 멀리서 보면 갓난아기의 형상으로 보일 것이다. 녀석들은 ‘갓난아기’라는 단어에 한없이 약하거든. 순수함, 무력함, 그리고 솟아나는 보호본능… 그들의 그 뻔한 반응을 떠올리면 속에서부터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망설이며 다가온다. 둥글고 순박한 얼굴에 어딘가 걱정스러움이 어려 있는 눈빛. 예상했던 대로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넨다. 그의 눈은 내가 안고 있는 작은 꾸러미에 닿았다가 다시 불안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최대한 가련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목 끝에 걸린 듯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속삭인다.
“저… 죄송하지만, 잠시만 이 아이를 좀 맡아주시겠어요?
제가… 잠깐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정말 금방 돌아올게요.”
마지막 말은 떨림과 흐느낌을 섞어 간신히 내뱉는다.
녀석의 눈빛이 확연히 흔들린다. 품 안의 짐이 작고 가여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리석은 녀석. 알지도 못하면서. 이 보잘것없는 천 조각은 곧 녀석의 온몸을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무게로 변할 텐데. 그 무게에 녀석의 어깨가 꺾이고 발이 땅에 들러붙을 때쯤이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겠지.
“제가 안고 있을까요?” 남자는 망설임 없이 따뜻한 손을 내민다.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빛이 어려 있다. 순진한 인간.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최대한 힘없는 척, 가녀린 척하며 짐을 녀석에게 조심스럽게 건넨다. 녀석의 손에 그 짐이 닿는 순간, 나는 미세하게나마 느껴지는 녀석의 당황스러움을 감지한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짐의 무게가 순식간에 몇 배로 불어나는 것을 느꼈겠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손은 짐을 놓기에는 너무나 깊이 동정심에 얽매여 있으니까. 그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그는 아직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금방 다녀올게요.” 나는 뒤돌아선다.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 나는 희미하게 차가운 미소를 흘린다. 순진한 인간을 속이는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즐기는 ‘재미’의 시작이니까.
몇 걸음 멀어지자, 서서히 나의 본래 모습이 드러난다. 녀석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나의 등 뒤에서는 인간의 형상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그 자리를 길고 축축한 비늘 덮인 뱀의 몸이 대신한다. 길게 늘어진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나는 나의 차갑고 텅 빈 눈빛은, 먹잇감을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롭다. 주변의 물결조차 나의 변화를 감지한 듯, 조용히 길을 비켜선다.
녀석의 비명소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터져 나온다. 짐의 무게가 상상 이상이었겠지. 녀석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지만, 이미 발은 땅에 단단히 붙어버린 후다. 녀석의 두려움에 찬 신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린다.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간다. 녀석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고, 떨리는 입술은 무언가를 간절히 외치려 한다. 그 절망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이 사냥의 가장 달콤한 결말이지.
“어… 어서 도망가세요!” 녀석은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어 소리친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아직 남을 걱정하다니.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로군.
나의 입가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선다. 녀석의 눈이 마침내 절망과 포기로 가득 찬 순간…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온몸을 휘감는다. 녀석의 마지막 비명은 찰나의 순간, 밤의 어둠과 물소리에 섞여 흔적 없이 사라진다. 만족스러운 포만감과 함께, 나는 다시 차가운 물결 속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다음 어리석은 인간은 언제 이 물가로 다가올까? 오늘 밤, 달빛은 유난히 녀석들의 어리석음을 비춰주기에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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