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소미’는 낡았지만 햇볕이 잘 드는 이 원룸으로 이사 온 지 일주일째였다. 혼자 사는 것은 익숙했지만, 새로운 공간이 주는 낯섦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좁은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며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나갔다. 침대는 창가에, 책상은 그 맞은편에, 그리고 방 한쪽 벽면에는 새로 산 키 큰 옷장을 바싹 붙여 세웠다.
모든 정리가 끝났을 때, 그녀는 만족스럽게 방을 둘러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새로 놓은 옷장과 벽 사이. 분명 최대한 붙인다고 붙였지만, 어쩔 수 없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의 어둡고 깊은 틈새가 세로로 길게 남아 있었다. ‘먼지만 쌓이겠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일에 몰두했다.
그날 밤부터였다. 마감에 쫓겨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데, 문득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방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텅 빈 침대, 닫힌 현관문, 그리고 어둠에 잠긴 옷장. ‘피곤해서 그런가.’ 소미는 찝찝함을 애써 떨치며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며칠간, 혼자 방에 있을 때면 어김없이 등 뒤가 서늘해졌다. 이상하게도 그 시선은 늘 같은 방향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바로 옷장과 벽 사이, 그 검고 긴 틈새에서부터.
어느 날 오후, 소미는 바닥에 떨어진 펜을 줍다가 무심코 그 틈새를 바라보게 되었다. 어둠으로 꽉 차 있어야 할 그곳에, 무언가 있었다. 아주 잠깐, 사람의 눈동자 같은 것이 자신을 응시하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잘못 봤나…?”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 틈새를 비춰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낡은 벽지와 먼지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소미는 더 이상 그 틈새에 등을 보이고 앉을 수 없었다. 그녀는 책상의 위치를 바꾸어, 옷장을 마주 보고 앉기 시작했다. 차라리 지켜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며칠간은 평화로운 듯했다. 하지만 불안은 다른 형태로 찾아왔다. 책상 위에 두었던 물건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미세하게 위치가 바뀌어 있거나, 분명히 닫아둔 옷장 문이 살짝 열려 있기도 했다. 마치 그녀가 잠든 사이, 누군가 방 안을 돌아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가 일상이 될 무렵, 사건이 터졌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밤이었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작업에 몰두하던 소미는 잠시 뻐근한 목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습관처럼 옷장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숨을 멈췄다.
옷장과 벽 사이의 그 어두운 틈새. 그 안에서, 하얗고 긴 손가락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틈새의 어둠 그 자체가 변해서 생긴 것처럼, 비현실적인 움직임이었다. 손가락은 틈의 가장자리를 짚더니, 이내 얼굴의 반쪽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동자 하나만이 소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입꼬리만 기괴하게 끌어올리며 웃고 있었다.
“아… 아아…”
소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온몸이 얼어붙어 꼼짝할 수 없었다. 눈을 피해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것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소리 없는 비명처럼.
“나랑… 같이 놀자…”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차가운 속삭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가느다란 팔을 틈새 밖으로 뻗어 소미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오라는 듯이.
그때였다. 공포에 질린 소미가 뒷걸음치다 의자에서 넘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현관문으로 기어갔다. 살아야 한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발목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에는, 어느새 침대 밑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또 다른 하얀 팔이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어딜 가…”
침대 밑에서, 그리고 옷장 틈새에서, 방 안의 모든 어둠 속에서 그것들이 속삭였다. 수십 개의 팔들이 나타나 그녀의 몸을 붙잡고, 각자의 틈새 속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안돼! 싫어! 놔!”
소미의 비명은 방 안에서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녀의 몸은 마치 고무처럼 늘어나며,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던 좁디좁은 틈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마지막 시야에 보인 것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자신의 방 천장이었다.
다음 날, 집주인은 소미와 연락이 닿지 않자 경찰과 함께 그녀의 원룸을 찾았다. 방 안은 소미가 처음 이사 왔을 때처럼 모든 가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가 쓰던 물건, 그녀가 그리던 그림,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오직, 소미 한 사람만 감쪽같이 사라진 채로.
경찰은 단순 가출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집주인은 방을 둘러보다가 혀를 쯧쯧 찼다.
“에휴, 요즘 젊은 애들이란. 가구를 이렇게 벽에 바싹 붙여놓으면 벽지 상하는데…”
그는 투덜거리며 옷장을 벽에서 살짝 떼어놓았다. 그 순간, 옷장과 벽 사이의 어두운 틈새에서 무언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소미가 항상 머리에 꽂고 있던, 작은 토끼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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