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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비 오는 날의 방문자

by 오하81 2025.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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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인 ‘태민’은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번듯한 대학, 그를 따르는 친구들, 장밋빛 미래. 그는 10년 전, 중학교 시절의 일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했다. 철없던 시절의 불장난, 낄낄거리며 동조했던 비겁한 침묵, 그리고 ‘이미희’라는 아이의 일그러진 얼굴까지도.

 

모든 것은 한 통의 문자 메시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중학교 동창, ‘진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진우는 그들을 이끌던 무리의 대장이었다.

 

[야, 박태민. 너… ‘히키코’ 기억나?]

 

‘히키코’. 그들이 이미희에게 붙여준 끔찍한 별명이었다.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후, 음침하게 복도를 끌며 걷는 그녀를 비웃으며 만든 이름. 태민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답장을 하기도 전에,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년이 우릴 찾아다니는 것 같아. 얼마 전에 상철이 실종됐어. 비 오는 날 밤이었대. 제발 이 문자 보면 연락 좀 줘. 나 너무 무서워.]

 

태민은 코웃음을 쳤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 무슨 귀신 타령이란 말인가. 그는 ‘헛소리하지 마라’고 답장을 보내려다, 손가락을 멈췄다. 며칠 전 뉴스에서 본 실종 사건이 머릿속을 스쳤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흔적도 없이 사라진 20대 남성. 그가 바로 상철이었을까?

 

그날 밤부터 태민은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는 10년 전의 교실로 돌아갔다. 진우와 상철, 그리고 자신이 주도하여 이미희를 계단에서 밀어버리던 그날. 나뒹굴며 비명을 지르던 미희의 모습,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자신들을 올려다보던 그 증오에 찬 눈빛. 미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 모양만으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질… 질… 끌… 고… 갈… 거… 야…’

 

잠에서 깬 태민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시커먼 비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올여름 가장 강력한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저녁이 되자 예보대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 방 안,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마치 누군가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들렸다. 불안감을 떨치려 TV 소리를 키웠지만, 온 신경은 현관문 너머에 쏠려 있었다.

그때였다.

 

히키… 히키… 히키…

 

복도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젖은 자루 같은 것을 바닥에 대고 질질 끄는 듯한, 기분 나쁜 마찰음이었다. 태민은 숨을 죽였다. ‘청소 아주머니일 거야.’ 하지만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의 오피스텔 문 앞에서, 소리가 뚝 그쳤다.

 

정적이 흘렀다. 태민은 심장이 터질 듯한 공포 속에서 현관문만 노려보았다. 제발, 그냥 지나가기를.

 

따르르르릉!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태민은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발신자는 진우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태민아! 태민아! 그년이야! 히키코가 왔어! 창문 밖에… 으아아악!”

 

수화기 너머로 진우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유리가 박살 나는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 태민은 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히키… 히키… 히키…

히키...히키..

태민이 공포에 질려 휴대폰을 떨어뜨린 순간, 그의 현관문에서 ‘쿵!’ 하는 둔탁한 충격음이 울렸다. 마치 사람이 온몸으로 부딪쳐온 듯한 소리. 이어서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문을 보던 태민은, 홀린 듯 현관문 렌즈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렌즈에 바싹 달라붙은, 짓이겨지고 뒤틀린 여자의 얼굴을.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증오로 불타는 눈동자 하나가 자신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문… 열어…”

 

문 너머에서,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현관문 잠금장치가 터져나가며 문이 활짝 열렸다.

그곳엔 ‘그것’이 서 있었다. 온몸은 비에 젖어 있었고, 옷은 흙과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한쪽 다리는 기괴한 각도로 꺾여 힘없이 끌리고 있었다. 망가진 얼굴, 증오만이 남은 눈동자. 10년 전 이미희의 모습에, 지옥의 고통을 더한 형상이었다.

 

그것은 꺾인 다리를 바닥에 끌며, 히키… 히키… 소리를 내며 태민에게 다가왔다.

 

“너도… 데리러 왔어…”

 

그것은 앙상한 팔을 뻗어 태민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철 같은 악력이었다. 태민의 비명은 빗소리에 묻혔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복도로 끌려 나갔다. 거친 바닥에 머리와 등이 부딪히는 고통 속에서, 그의 귓가에는 오직 두 가지 소리만이 영원처럼 맴돌았다. 자신의 처절한 비명과, 점점 더 멀어지는 끔찍한 그 소리.

 

히키… 히키… 히키… 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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