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후안 코슬레이의 여름은 숨 막히는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모든 생명이 그 기세에 굴복하는 시에스타(Siesta) 시간, 태양은 아스팔트를 녹일 듯 내리쬐었고, 하얀 회벽 집들은 창문을 굳게 닫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열여섯 살의 마테오는 그 정적이 죽음처럼 느껴졌다.
“또 그 늙은이 타령이에요, 아부엘라 할머니?”
마테오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운 채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아부엘라는 뜨개질을 멈추고 돋보기안경 너머의 주름진 눈으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시에스타에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 아니야. 특히 너처럼 어른 말 안 듣는 아이는 ‘자루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지.”
“제발요, 할머니. 제가 몇 살인 줄 아세요? 그런 건 다섯 살짜리 애들이나 믿는 거라고요. 세상에 자루에 애들을 담아가는 할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엘 비에호 데 라 볼사(El Viejo de la Bolsa)’, 자루 할아버지.
마테오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밤늦게까지 놀거나, 어른 말을 듣지 않으면, 남루한 차림의 늙은이가 나타나 커다란 삼베 자루에 담아간다는 전설. 그저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낡아빠진 레퍼토리일 뿐이었다.
“옛날이야기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란다, 마테오.” “됐어요. 답답해 죽겠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아부엘라의 만류를 뒤로하고, 마테오는 보란 듯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살갗을 태울 듯한 열기가 그를 덮쳤다. 텅 빈 거리에는 그의 발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중앙 광장을 향해 걷는 동안, 그는 자신의 반항적인 행동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다. 이 지긋지긋한 정적과 낡은 미신으로부터의 해방.
광장 역시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분수대의 물줄기마저 더위에 지쳐 멈춰버린 듯했다. 마테오는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거리의 모퉁이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저 뜨거운 날씨에도 폐지를 주우러 나온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노인의 모습은 어딘가 기이했다. 온몸은 때와 먼지로 뒤덮인 누더기 옷에 감싸여 있었고, 헝클어진 백발은 오랫동안 씻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는, 몸집만 한 거대한 삼베 자루가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스윽... 스윽...
자루가 아스팔트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작열하는 대기 속을 낮게 파고들었다. 마테오는 저도 모르게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노인을 주시했다. 노인은 허리를 깊게 구부린 채, 마치 무언가 냄새를 맡는 사냥개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마테오의 심장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 속 ‘자루 할아버지’의 모습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아니야,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선은 노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노인이 점점 가까워지자, 역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실려왔다. 오래된 먼지와 곰팡이가 뒤섞인 냄새, 그리고 그 아래에 희미하게 깔린, 비릿하고 달콤한 핏물 같은 냄새.
그 순간, 노인이 끌고 가던 자루가 크게 한번 꿈틀거렸다.
마치 안에서 작은 짐승이라도 발버둥 치는 것처럼. 마테오는 숨을 멈췄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린 시절, 그의 잠자리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상상 속의 존재가 지금 그의 눈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마테오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벤치 뒤편, 두꺼운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귀 바로 옆에서 쿵쿵 울렸다. 제발 그냥 지나가기를. 제발 나를 보지 못하기를.
스윽... 스윽... 스윽...
자루 끌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테오가 숨은 벤치 바로 앞에서, 소리가 뚝 그쳤다. 마테오는 기둥 틈새로 겨우 밖을 엿보았다. 노인이 그곳에 멈춰 서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든 채, 텅 빈 광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얼굴은 주름과 검버섯으로 뒤덮여 눈코입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는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허공의 무언가를 음미하듯 코를 벌름거릴 뿐이었다.
‘날 못 봤어. 그냥 가는 거야.’
마테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노인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삐걱이는 소리를 낼 것처럼 그가 숨은 기둥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썩은 나뭇잎이 부서지는 듯한 갈라진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마테오.”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마테오의 세상은 얼어붙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노인의 입가가 기괴하게 비틀어지며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그는 자루를 내려놓더니, 낡고 더러운 손으로 자루의 입구를 풀기 시작했다.
마테오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은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자루의 입구가 열리자, 안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곳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모든 빛과 소리를 빨아들이는 공허, 지옥의 입구 그 자체였다.
바로 그때, 그 어둠 속에서 작고 하얀 손 하나가 필사적으로 뻗어 나왔다. 하지만 그 손은 곧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다시 어둠 속으로 거칠게 끌려 들어갔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마테오는 비명을 지르며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골목으로, 텅 빈 상점가로, 정신없이 달렸다. 뒤에서 ‘스윽, 스윽’ 하는 소리가 그를 쫓아왔다. 빠르진 않았지만, 결코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 저주 같은 소리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익숙한 우리 집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마테오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던졌다. 쾅! 문을 닫고 모든 잠금장치를 걸자마자, 그는 그대로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마테오! 괜찮니? 대체 무슨 일이야!”
아부엘라가 놀라 달려왔다. 마테오는 공포에 질려 횡설수설하며 방금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아부엘라는 아무 말 없이 손자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녀의 품에서, 마테오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끝났다. 집은 안전하다.
“그래… 이제 괜찮다. 집에 왔으니 괜찮아.”
아부엘라의 목소리에 안심하며 진정하던 마테오는,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까슬까슬한 것이 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무심코 그것을 꺼내 본 순간, 그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거칠고 더러운 삼베 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분명히 그 ‘자루 할아버지’의 자루에서 뜯어져 나온 조각이었다. 언제 주머니에 들어온 것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마테오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아부엘라를 바라보았다. 아부엘라의 얼굴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마테오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제 그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 알게 되었구나.”
그날 이후, 마테오는 두 번 다시 시에스타 시간에 집을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지면, 그는 종종 창밖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아주 멀리서부터,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다가오는 소리.
스윽... 스윽...
그 소리는 결코 문 앞까지 오지는 않았다. 그저 동네 어딘가를 배회하다가 새벽이 오기 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마테오는 알고 있었다.
자루 할아버지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또다시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되기를. 어른들의 통제를 벗어나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을.
그리고 언젠가, 그가 준비가 되면, 자루는 기꺼이 그를 위해 입을 벌릴 것이다. 마테오의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매일 밤, 창밖에서 시작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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