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10시가 넘은 시각. 야간 자율 학습(야자)이 끝나고 무거운 책가방을 멘 켄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더 느렸다. 4월 말이지만 밤공기는 제법 쌀쌀했고, 낮에 잠깐 내린 비 때문인지 옅은 안개까지 자욱하게 내려앉아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하게 번져 보였다. 집으로 가는 길은 아파트 단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골목길이 지름길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길이 유난히 어둡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괜히 늦게 나왔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켄지는 어깨를 움츠렸다. 친구들은 PC방에 간다며 먼저 떠났고, 혼자 남아 깜빡 잠드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아 있었다. 텅 빈 복도를 걸어 나올 때부터 느껴졌던 기묘한 정적과 한기가 아직도 등 뒤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반 아이들 사이에서 '입 찢어진 여자', 쿠치사케온나 괴담이 다시 돌고 있었다. 시험 기간만 되면 으레 그런 괴담들이 유행처럼 번지곤 했지만, 작년에 옆 학교 학생이 밤늦게 귀가하다 실종되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겹쳐 아이들은 제법 진지하게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에이, 설마. 다 애들 장난이지.'
켄지는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다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익숙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오래된 빌라와 상가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은 가로등 몇 개가 전부였고, 대부분은 가게들이 문을 닫아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걸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골목 안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했다.
그때였다.
또각... 또각...
자신의 운동화 소리와는 다른, 낮고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가 등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켄지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잘못 들었겠지.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볼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발걸음 소리도 빨라졌다.
또각, 또각, 또각...
마치 여자의 구두 소리 같기도 했고, 무언가 딱딱한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켄지는 거의 뛰다시피 골목을 빠져나왔고,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둡고 안개 낀 골목 끝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아... 하아... 뭐야, 잘못 들었잖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불안하게 요동쳤다. 집까지는 아직 조금 더 가야 했다. 그는 큰길 대신, 빌라 건물 사이의 더 좁고 어두운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으스스한 밤길을 벗어나고 싶었다.
샛길은 양옆 건물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져 가로등 불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았다.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빨리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샛길 중간쯤 이르렀을 때, 저 앞쪽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인영을 발견했다. 키가 큰 사람 같았다. 가로등도 없는 이곳에 왜 사람이 서 있지?
켄지는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인영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 혹시 술 취한 사람인가? 아니면... 켄지의 머릿속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기요...?"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인영은 천천히 켄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달빛이나 가로등 불빛이 없어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지만,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긴 코트를 입고 있는 여자 같았다. 그리고 얼굴에는... 하얀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였다.
또각... 또각...
아까 들었던 그 발걸음 소리였다. 여자는 켄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우뚝 섰다. 훅 끼쳐오는 싸늘한 공기와 함께, 오래된 병원에서나 날 법한 희미한 소독약 냄새, 혹은 비릿한 녹 냄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켄지는 공포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여자의 키는 켄지보다 훌쩍 컸고,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은 어둠 속에서도 기묘하게 빛나는 듯했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켄지를 내려다보았다.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살짝 뭉개졌지만, 내용은 또렷하게 들렸다.
"학생..."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낮았다.
"...나... 예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괴담 속의 그 질문. 켄지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예쁘다고 하면 마스크를 벗고 다시 물을 테고, 안 예쁘다고 하면 바로 죽는다고 했다. 그럼... 보통이라고? 아니면 포마드? 하지만 지금 포마드가 있을 리 없었다. 벳코아메 사탕 같은 것도 없었다.
켄지는 공포에 질려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침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여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희미하게 웃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천천히, 마스크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켄지는 눈을 질끈 감아버릴까 생각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여자의 손이 마스크 끈을 푸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얀 마스크가 천천히 벗겨져 내렸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녀의 입은 양쪽 귀밑까지 길고 깊게 찢어져 있었고, 검붉은 속살과 희번덕거리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그 사이로 언뜻 보였다. 안개 속 희미한 빛 아래에서도 그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은 켄지의 뇌리에 똑똑히 박혔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또다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래... 도...?"
그 순간, 켄지의 얼어붙었던 몸이 풀렸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책가방이 등 뒤에서 격렬하게 흔들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타다다다닥!
등 뒤에서 그녀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발걸음 소리는 더 이상 또각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기괴한 소리였다. 쉭쉭거리는 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바닥을 긁는 소리 같기도 했다.
켄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렸다. 샛길을 벗어나 다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뒤쫓아왔다. 어둠 속에서 언뜻 돌아본 그녀의 모습은 마치 땅 위를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것 같았다. 손에 들린 차갑고 녹슨 가위의 날이 희미한 불빛에 번뜩였다.
"포마드! 포마드! 포마드!"
켄지는 괴담에서 들었던 대처법을 미친 듯이 외쳤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섬뜩한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듯했다. 소용없었다.
코너를 돌면 바로 집 앞이었다. 켄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코너를 도는 순간, 그는 필사적으로 아파트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쿵! 하고 현관문에 부딪히며 넘어졌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손이 덜덜 떨려 자꾸만 빗나갔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그 기괴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녹슨 가위가 바닥에 끌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윽... 슥...
이제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것 같았다. 차갑고 비릿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켄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았다."
마스크 너머로 뭉개져 들려오던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 날 아침, 켄지가 살던 아파트 입구 앞에는 그의 책가방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밤새 내린 안개는 말끔히 걷혀 있었지만, 바닥에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길고 검붉은 얼룩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켄지는 그날 이후로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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