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도시, 실레네
오랜 옛날, 북아프리카 리비아 땅의 풍요로웠던 도시 실레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도시 외곽의 광활한 호수는 더 이상 생명의 젖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끔찍한 재앙의 근원, 거대한 용(龍)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의 비늘은 흑요석처럼 섬뜩한 빛을 발했고, 거대한 날개는 하늘을 뒤덮어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가장 끔찍한 것은 그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치명적인 독기였습니다. 용이 한번 숨을 내쉴 때마다 주변의 초목은 검게 타들어 갔고, 그 독기는 바람을 타고 도시까지 스며들어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가축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실레네의 시민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용의 분노를 잠재우지 않으면 도시 전체가 몰살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밤낮없이 그들을 짓눌렀습니다. 결국, 장로들과 왕은 끔찍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용에게 매일 제물을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양 두 마리로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가장 살진 양 두 마리가 선택되어 호숫가로 보내졌고, 사람들은 용이 그 제물을 받아들이고 잠잠해지기만을 숨죽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용의 탐욕은 끝이 없었고, 도시의 양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마침내 양이 바닥나자, 더욱 비극적인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양 한 마리와 함께, 도시의 젊은이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누가 용의 먹이가 될 것인지는 잔인한 제비뽑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매일 해 질 녘, 광장에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제비뽑기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름이 불린 젊은이의 가족은 오열했고, 남은 이들은 안도하면서도 다음번엔 자신의 차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서리쳤습니다. 실레네는 더 이상 활기찬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슬픔만이 가득한 잿빛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제2장: 공주의 희생과 절망의 정점
시간이 흘러, 도시의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차례차례 용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제비는 왕의 단 하나뿐인 외동딸, 아름답고 현명한 공주의 이름을 지목했습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왕궁은 비탄에 잠겼습니다. 백발의 왕은 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는 왕국의 모든 금은보화를 내놓을 테니, 제발 딸 대신 다른 이를 보내달라고 백성들에게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식을 용에게 빼앗긴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시민들은 냉담했습니다. "폐하,"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서 말했습니다. "폐하의 슬픔은 알겠으나, 우리 역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식들을 떠나보냈습니다. 폐하께서 정한 법도에 따라 공주님 또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공주님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용의 독기에 스러질 것입니다." 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딸에게 가장 화려한 옷을 입히고, 눈물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공주는 두려웠지만,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눈부신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창백한 얼굴의 공주는, 왕과 신하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홀로 호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에는 실레네 전체의 슬픔과 절망이 내려앉은 듯했습니다. 호숫가에 다다른 공주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3장: 구원자의 등장, 성 조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공주의 눈앞에는, 빛나는 갑옷을 입고 백마에 올라탄 늠름한 기사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용맹한 군인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성 조지였습니다. 먼 길을 여행하던 그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되었고, 슬픔에 잠겨 홀로 서 있는 아름다운 공주를 발견한 것입니다.
"공주님, 어찌하여 이 외진 곳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성 조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공주는 깜짝 놀라 기사를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이 도시를 위협하는 끔찍한 용과 자신의 슬픈 운명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공주는 간절하게 외쳤습니다. "기사님, 이곳은 위험하니 어서 피하십시오! 곧 용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성 조지는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투구를 고쳐 쓰고 창을 단단히 움켜쥐었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불타는 정의감과 깊은 신앙심이 서려 있었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공주님. 제가 여기 있는 한, 당신을 해치게 두지 않겠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저 사악한 용에 맞서 싸우겠습니다."
바로 그때, 호수 수면이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거대한 용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용은 제물로 바쳐진 공주를 발견하고 만족스러운 듯 포효하며 다가왔습니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지만, 성 조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제4장: 신앙의 힘과 용의 제압
성 조지는 말의 고삐를 당겨 용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는 가슴에 성호를 긋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용의 거대한 몸체를 향해 창을 힘껏 내질렀습니다. "꿰액!" 용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습니다. 성 조지의 창은 단단한 용의 비늘을 꿰뚫고 깊은 상처를 입혔습니다. 하지만 용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고, 분노하여 독기를 내뿜으며 반격했습니다.
성 조지는 뛰어난 기마술로 용의 공격을 피하며 다시 한번 창을 휘둘렀습니다. 용은 더욱 거세게 저항했지만, 성 조지의 용기와 신앙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마침내 용은 큰 상처를 입고 지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성 조지는 용을 완전히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말에서 내려 공주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공주님, 당신의 허리띠를 풀어 저 용의 목에 매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용은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주는 두려웠지만, 성 조지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 용기를 내어 다가갔습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허리띠를 풀어 용의 목에 걸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포악하게 날뛰던 용이 마치 온순한 양처럼 고개를 숙이고 공주를 순순히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5장: 도시의 개종과 완전한 구원
성 조지는 공주와 함께, 허리띠에 묶인 채 순순히 따라오는 용을 데리고 실레네 시로 향했습니다. 도시 성문 앞에 다다르자, 용의 기괴한 모습과 그 뒤를 따르는 공주와 기사를 본 시민들은 경악과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습니다. "용이다! 용이 도시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순간, 성 조지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실레네 시민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용은 더 이상 여러분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교의 신들을 버리고,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제가 여러분 앞에서 이 사악한 괴물을 완전히 처치하겠습니다!"
왕과 시민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적인 광경과 성 조지의 위엄 있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용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왕은 앞으로 나서 성 조지에게 약속했습니다. "기사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겠습니다. 부디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날, 실레네에서는 역사적인 세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왕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황금 전설》에 따르면, 이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남자만 1만 5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온 도시가 새로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었을 때, 성 조지는 약속대로 검을 뽑아 들었습니다. 그는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는 용의 목을 베어 마침내 길고 길었던 공포의 시대를 끝냈습니다.
제6장: 영원히 기억될 전설
용이 사라지자 실레네에는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왕은 도시를 구원한 영웅에게 감사의 표시로 막대한 금은보화를 내렸지만, 성 조지는 이를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이 재물은 제가 가질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모실 교회를 짓는 데 사용하십시오."
성 조지의 고결함에 감탄한 왕과 시민들은 그의 뜻에 따라 도시 중심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는 성모 마리아와 성 조지에게 봉헌되었으며, 제단 아래에서는 맑은 샘물이 솟아나 병든 이들을 치유했다고 전해집니다.
성 조지는 얼마 후 실레네를 떠나 다시 그의 길을 갔지만, 그가 남긴 용기와 신앙의 이야기는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성 조지와 용의 전설은 단순한 옛이야기를 넘어, 굳건한 믿음으로 악을 물리치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 조지는 잉글랜드, 조지아 등 수많은 나라와 도시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그의 축일인 4월 23일에는 용을 물리친 그의 용맹함을 기리는 축제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예술, 문학, 그리고 사람들의 신앙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며, 선(善)이 악(惡)을 이기는 영원한 진리를 되새기게 합니다.
'민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벨룽겐의 노래 3부: 얼음 여왕과 교묘한 속임수 - 두 번의 결혼식 (24) | 2025.05.05 |
---|---|
니벨룽겐의 노래 2부: 영웅, 공주를 만나다 - 지크프리트와 위험한 약속 (12) | 2025.05.05 |
니벨룽겐의 노래 1부: 서막 - 라인강의 영웅과 부르군트의 공주 (22) | 2025.05.04 |
《니벨룽겐의 노래》 깊이 보기: 주요 인물과 이야기의 배경 (24) | 2025.05.04 |
드라큘라 백작의 고백: 인간 블라드, 뱀파이어가 되다 (45) | 2025.04.27 |
캄보디아 신화 속 영웅, 날개 달린 크루드 이야기: 암리타를 훔쳐 어머니를 구하다 (78) | 2025.04.24 |
아서왕 이야기 5부: 카멜란 전투와 영원한 전설 (27) | 2025.04.23 |
아서왕 이야기 4부: 금지된 사랑과 드리운 배신의 그림자 (49) | 2025.04.22 |